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금란 나눔터
글수 250
얼마 전,
> 모 설문조사에서 복권에 당첨되면 무엇부터 바꾸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있었다.
> 대다수의 남자들이
> ‘아내’라고 대답했다고 한다.
> 대다수 여자들 또한
> ‘남편’이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.
> “아!
> 발 좀 치워봐.”
> 지금 허름한 바지를 입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방걸레질을 하는 그녀,
> 아내…
> 그 모습을 보면서,
> 나도 만약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,
> 나 역시 아내라고 대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.
> 아내가“점심은 비빔밥 대강 해 먹으려고 그러는데,
> 괜찮지?”한다.
> “또 양푼에 비벼먹자고?”
> “응,먹고 나서,
> 베란다 청소 좀 같이 하자.
> 집안 청소 다 했더니,
> 힘들어 죽겠어.”
> “나 점심 약속 있어.”
> “그런 얘기 없었잖아.”
> “…
> 있었어.
> 깜박하고 말 안 한 거야.
> 중식이…
> 중식이 만나기로 했잖아.”
> “그래?
> 할 수 없지 뭐.”
> 해외출장 가있는 친구 중식이를 팔아놓고,
> 중식이한테도 아내에게도 약간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,
> 한가로운 일요일,
> 난 아내와 집에서 이렇게라도 탈출하고 싶었다.
>
> 나름대로 근사하게 차려입고 나가려는데,
> 커다란 양푼에 밥을 비벼서,
> 숟가락 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아내가,
> 나를 본다.
> 펑퍼짐한 바지에 한쪽 다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모양이 영락없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아줌마 폼새다.
> 아내가 입을 우물거리며 묻는다.
> “언제 들어 올 거야?”
> “몰라.
> 저녁도 먹고 들어올지…”
> “나 혼자 심심하잖아.
> 빨리 들어와.”
> “애들한테 전화해 보든가….”
> 아내가 물 한잔을 마시고는“애들 뭐…
> 내가 전화하면 받아주기나 해?
> ‘엄마 나 바쁘니까 끊어’이 소리 하기 바쁘지”한다.
> “친구들 만나든가 그럼!”
> “내가 일요일 날 만날 친구가 어딨어?”
> 그렇다.
> 아내에게는 일요일에 만날 친구 하나 없다.
> 아이들 키우고 내 뒷바라지 하느라 그렇게 됐다는 게,
> 아내의 해묵은 레퍼토리다.
> 그 얘기 나오기 전에 어서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한다.
> 일단 밖으로 나가서,
>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을 끌어 모아 술을 마셨다.
> 밤
> 12시가 될 때까지 그렇게 노는 동안,
> 아내에게 몇 번의 전화가 왔다.
> 받지 않고 버티다가 마침내는 배터리를 빼 버렸다.
> 그리고 새벽
> 1시쯤 난 조심조심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.
> 아내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.
> 자나보다 생각하고 조용히 욕실로 향하는데 아내가 아픈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.
> “어디 갔다 이제 와?”
> “어.
> 친구들이랑 술 한잔…
> 그런데…
> 어디 아파?”
> “낮에 비빔밥 먹은 게 얹혔나봐.
> 약 좀 사오라고 그렇게 전화했는데 받지도 않고…”
> “…
> 배터리가 떨어졌어.”
> “손이라도 좀 따줘.”
> “그러게 그렇게 먹어대더라니…
> 좀 천천히 못 먹냐?”
> “버릇이 돼서 그렇지 뭐.
> 맨날 집안일 하다 보면,
> 그냥 대강 빨리 먹고 치우고…
> 이랬던 게…”
> 어깨에서 손으로 피를 몰아서 손끝을 바늘로 땄다.
> 아내의 어깨가 어느새 많이 말라 있었다.
>
> 다음날,
> 회식이 있어,
> 또 늦은 밤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.
> 그런데 아내가 또 소파에서 웅크린 자세로 엎드려 있다.
> “여보,
> 들어가서 자.”
> “여보,
> 나 배가 또 안 좋으네.”
> “체한 게 아직 안 내려갔나?”
> “그런가봐.
> 소화제 먹었는데도 계속 그래.”
> “손 이리 내봐.”
> 그런데 아내의 손끝은 상처 투성이었다.
> “이거 왜 이래?
> 당신이 손 땄어?”
> “어.
> 너무 답답해서…”
> “이 사람아!
> 병원을 갔어야지!
> 왜 이렇게 미련하냐?”
>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.
> 여느 때 같으면,
> 마누라한테 미련하냐는 말이 뭐냐며 대들만도 한데,
> 아내는 그럴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.
> 그냥 엎드린 채,
> 가쁜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.
>
> 난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.
> 아내를 업고 병원으로 뛰기 시작했다.
> 그런데 응급실에 도착하자 아내가 속삭였다.
> “여보.
> 병원 오니까,
> 괜찮은 거 있지.”
> “가만 있어봐.
> 검사 받아야 되니까.”
> “아니…
> 진짜 말짱해.
> 아까 잠깐 그렇게 아팠나봐.”
> “온 김에 검사 받고 가.”
> “뭐 하러 그래?
> 응급실 얼마나 비싼데~
> 내일 병원 문 열면,
> 가서 검사 받을게.”
> “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…”
> “가자니까.
> 응급실은 완전 바가지야.”
>
> 잡을 틈도 없이,
> 아내는 먼저 일어나 나간다.
> 나도 머쓱하게 아내를 따라 나온다.
> 하긴 아내의 말처럼 응급실은 보통 진료비보다 훨씬 비싸다.
>
> 집으로 오는 길,
>
> “진짜 괜찮아?”
> “응.
> 나 학교 다닐 때도,
> 시험 보기 전날이면 배 아프고 그랬다?
> 그런데 병원만 딱 오면 배가 안 아픈 거야.
> 그게 다 신경성이라 그런가봐.”
> “그러게,
> 사람 놀래키고 그래?
> 아프면 바로바로 병원 가고 그래.”“어머,
> 당신 놀랬어?
> 어유~
> 그래도 홀아비 되긴 싫었나봐?”
> “싫긴 뭐가 싫으냐?
> 홀아비 되면,
> 젊은 마누라도 새로 들이고 좋지.”
> “내가 말을 말아야지…”
>
> 참 오래전부터 내 곁에서 이렇게 함께 걸어왔던 아내.
> 그녀와 아주 오랜만에…
> 함께 길을 걸어본다.
>
> 다음날 병원에 다녀온 아내는,
> 회사 앞에서 내게 전화를 걸었다.
>
> “난데,
> 우리 점심 먹을까?”
> “바쁜데…”
> “회사 앞까지 왔는데?”
> “그래.
> 알았어.
> 병원은 갔다 왔어?”
> “어.
> 신경성 위염이래.
> 남편이 속 썩이냐고 물어보더라.
> 의사선생님이……”
> “나만큼 잘하는 남편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.
> 그런데,
> 뭐 먹고 싶어?”
> “죽 먹자.
> 요즘 좋은 죽 집 많다며?
> 그런 데 가서 우아하게 먹어보고 싶다.”
> “여기 괜찮지?"
> “횟집에서 죽도 파네?”
> “어.
> 우리 회식할 때 자주 오는 데야.”
> “그런데 너무 비싸다.
> 죽 한 그릇에 만 오천 원씩이나 해?
> 태어나서 이렇게 비싼 죽은 처음 먹어보네.”
> 아내는 죽을 바닥까지 긁어먹는다.
> 갑자기 열심히 죽을 먹는 아내가 안쓰러워 보였다.
> 만 오천 원짜리 죽 한 그릇이 아까워 그릇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먹는 아내…
> 난 몇 십만 원짜리 술도 아무렇지 않게 먹는데…
> 내 아내는 태어나 이렇게 비싼 죽을 처음 먹어 본단다.
> 그동안 내가 뭘 하고 살았나 생각이 문득 들었다.
> “여보,
> 할 말이 있는데.”
> “어,
> 얘기해.”
> “추석 때 있잖아.
> 친정부터 가면 안 될까?”
> “왜 또 그래?
> 어머니 성격 알면서…”
> “그러게.
> 30년 넘게 어머니 성격 아니까,
> 명절 때마다 당신 집부터 갔잖아?”
> “명절 때 시댁부터 가는 건,
> 당연한 거야.”
> “당신 집은 오남매야.
> 그치만 우리 집은 오빠랑 나밖에 없잖아.
> 엄마가 얼마나 외로워하시는데…”
> “추석 끝나고 가면 되잖아.”
> “어머니도,
> 당신도 웃겨.”
> “여보,
> 왜 이래?
> 새삼스럽게.”
> “그럼 이렇게 해.
> 추석 때 당신은 당신 집 가.
> 난 우리 집 갈 거야.”
> “어머니가 가만 계시겠어?”
> “가만 안 계시면 어떡하실 건데?
> 나도 할 만큼 했어.
> 맘대로 하시라 그래.”
> “당신,
> 오늘 좀 이상하다.”
> “30년 동안,
> 그만큼 이기적으로 부려먹었으면 됐잖아.
> 내가 이 정도 얘기하는 것도,
> 그렇게 이상해?”
>
> 큰소리친 대로,
> 아내는 추석이 되자,
> 짐을 몽땅 싸서 친정으로 가 버렸다.
> 나 혼자 고향집으로 내려가자,
> 어머니는 노발대발하시며,
> 세상천지에 며느리가 이러는 법은 없다고 난리를 치셨다.
> 지난
> 30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니,
> 이번만큼은 노엽게 생각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지만,
> 오히려 마누라 편든다며,
> 내게도 잔소리를 늘어놓으셨다.
>
> 여동생은 여동생대로 제 새언니 흉을 보면서,
> 무슨 며느리가 그렇게 제멋대로냐고 했다.
> 자기는 임신을 핑계로,
> 추석 전부터 친정집에 와서 쉬고 있으면서,
> 제 새언니가 친정에 간 건 그렇게 못마땅한가 보다.
>
> 아내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니,
> 우리 가족이지만,
> 하는 말마다 행동마다 참 얄미울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.
> 결혼하고 처음.
> 아내가 없는 명절을 보냈다.
>
> 집으로 돌아오니,
> 아내가 태연히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.
> 여유롭게 클래식 음악까지 틀어놓고 말이다.
> “당신,
> 지금 뭐 하는 거야?”
> 아내가 음악을 끄면서 대답했다.
> “음악 들으면서 책 보잖아.
> 왜?”
> “제정신이야?
> 어머니 얼마나 화나셨는지 알면서,
> 명절 내내 전화 한 통화 안 해?”
> “어머니 목소리 별로 듣고 싶지 않았어.
> 간만에 좋은 기분,
> 망칠 필요 없잖아.”
> “뭐??”
> “가끔 뉴스에서 주부 우울증으로 투신자살하는 여자들 얘기 들으면,
> 생각했었어.
> 남은 가족들은 어쩌라고 저랬을까?”
> “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?”
> “그런데,
> 나 이제 이해가 돼.
> 그 여자들은 남은 가족들이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택했을 거야.”
> “그게 말이 돼?”
> “내가 지금 없어져도,
> 당신도 애들도 어머님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을 거야.
> 처음엔 조금 슬프겠지만,
> 금방 잊을 거야!”
> “……여보?!……”
>
> 아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.
> “여보.
> 나 명절 때 친정에 가 있었던 거 아니야.
> 나,
>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 검사 받았어.
> 당신이 한번 전화만 해봤어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거야.
> 당신이 그렇게 해주길 바랬어.
> 그래서,
> 내가 어디로 갔을까 놀라서 나를 찾아주길 바랬어.
> 침대에 혼자 누워서 당신이 헐레벌떡 나타나 주면,
> 뭐라고 하면서 안길까…
> 혼자 상상 했었어.
> 그런데,
> 당신 끝내 안 나타나더라.
> 끝내 나 혼자 두더라.”
> 그랬다.
> 아내의 병은 가벼운 위염이 아니었던 것이다.
>
> 다음날 나와 아내는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.
> 검사 결과에 대해 얘기를 듣기 위해서였다.
> 가는 내내 아내는 무거운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.
> 내가
> “죽으러 가냐?”했다.
> “무슨 말을 그렇게 해?”
> “설령 위암이라고 하더라도,
> 요즘 위암?
> 아무것도 아니야.
> 요즘은 다 고쳐.”
> “그래.
> 누가 뭐래?”
> “악성도 다 고친다구.
> 내 친구 차 교수 알지?
> 그 친구도 위암
> 3기였는데,
> 멀쩡하잖아.
> 요샌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 거!
> 진짜 아무 것도 아니라구!”
> 누구를 위로하기 위해 큰소리를 치는 건지 알 수 없었다.
>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한 건지,
> 나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건지…
> 큰 소리 치면서도 운전대 잡은 손에 땀이 흥건하게 고였다.
> 그러면서도 난 끝까지 중얼거렸다.
> “암?
> 쳇!
> 그런 거 아무 것도 아니야.
> 아무 것도…”
>
> 난 의사의 입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.
>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,
> 내 아내가 위암이라고?
> 전이될 대로 전이가 돼서,
>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고…
> 수술도 하기 어려운 상태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…
> 가고 싶은 데 있다고 하면 데려가 주고,
> 먹고 싶은 거 있다고 하면 먹게 해 주라고…
> 삼 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고…
> 지금,
>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?
> 자기가 뭔데!
> 자기가 하나님인가?
> 자기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아나?
> 내 아내가 내 곁에서
> 3개월을 살지,
> 3년을 살지,
> 30년을 살지 어떻게 알고 저렇게 함부로 말을 한단 말인가!
>
> 따지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,
> 그리고 멱살이라도 잡고,
>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,
> 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,
> 그저 의사의 입을 바라보고만 있었다.
>
> 아내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.
> 유난히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맑았다.
> “……
> 여보!!……”
> 아내의 음성이 조용히 귓가에 내려앉는다.
> 아내가 살포시 팔짱을 끼고,
>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.
> 난 아내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다.
> 지금 그녀를 보면,
> 절망으로 가득한 내 얼굴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.
> 그러긴 싫었다.
> “여보….”
>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.“왜?”
> “………
> 미안해.”
> “미안하긴 뭐가 미안해?
> 내가 아까 말했지?
> 차 교수도 처음에 병원 갔을 때,
> 똑같이 말했대.
> 차 교수도
> 3개월,
> 아니
> 2개월 산다 그랬대!
> 그런데 지금 봐.
> 멀쩡하게 다니잖아.
> 그 친구가 나보다 힘도 더 세고 더 튼튼해!
> 의사 자식들이 하는 말,
> 저거…
> 다 뻥이야!
> 사람 겁주고…
> 어?
> 겁줘서 돈 뜯어낼려고 하는 소리야!
> 믿지 마,
> 저런 말!!”
> 나는 바보다.
> 끝까지 아내 앞에선 강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큰 소리 치고 있다.
> 하지만 난 지금 너무 무섭다.
> 아내가 잡고 있는 내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너무너무 겁나고 무섭다.
> 아내의 따뜻한 손이 내손을 꼭,
> 더 꼭 잡아준다.
>
> 집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서로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.
> 주위에서 누가 암에 걸렸다,
> 누구 부인이 죽었다 이런 얘기 많이 듣는 나이가 됐지만,
> 그런 일이 내게 닥칠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.
> 엘리베이터에 탄 아내를 보며,
> 앞으로 나 혼자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 어떨까를 생각했다.
> 문을 열었을 때,
>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아내가 없다면,
> 방걸레질을 하는 아내가 없다면,
> 양푼에 밥을 비벼먹는 아내가 없다면,
>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잔소리해 주는 아내가 없다면,
> 나는 어떡해야 할까를 생각했다.
> 처음으로 우리 집으로 장만한 이 아파트에는 아내의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이다.
> 집에 들어서니
> “여보,
> 우리 이사 갈까?”하고는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내가 말했다.
> “여기 우리 둘이 살기에는 너무 넓잖아?”
> “됐어.
> 난 여기가 좋아.”
> “아니야.
> 너무 낡았어.
> 이 집 팔고 조금 작은 평수,
> 새 집으로 이사 가면 좋잖아.”
> “됐다고 하잖아.”
> “이 집이 당신 괴롭힐 거라고 생각하니까,
> 이 집…
> 정말 싫어.”
>
> 다음날,
> 아내는 함께 아이들을 보러 가자고 했다.
> 아이들에게는 아무 말도 말아달라는 부탁과 함께.
>
>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은,
> 갑자기 들이닥친 부모가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.
> 하지만 아내는 살갑지도 않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,
> 공부에 관해,
> 건강에 관해,
> 백번도 넘게 해온 소리들을 해대고 있다.
> 아이들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한데도,
> 아내는 그런 아이들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만 있다.
> 난 더 이상 그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.
> 아이들을 만난 후 아내가“여보,
> 집에 내려가기 전에…
> 어디 코스모스 많이 피어 있는 데 들렀다 갈까?”했다.
> “코스모스?”
> “그냥 그러고 싶네.
> 꽃 많이 피어있는 데 가서,
> 꽃도 보고,
> 당신이랑 걷기도 하고…”
> 아내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이런 걸 해 보고 싶었나보다.
> 비싼 걸 먹고,
> 비싼 걸 입어보는 대신,
> 그냥 아이들 얼굴을 보고,
> 꽃이 피어 있는 길을 나와 함께 걷고…
> “당신,
> 바쁘면 그냥 가고…”
> “아니야.
> 가자.”
>
> 코스모스가 들판 가득 피어있는 곳으로 왔다.
> 아내에게 조금 두꺼운 스웨터를 입히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.
> “여보,
> 나 당신한테 할 말 있어.”
> “뭔데?”
> “우리 적금,
> 올 말에 타는 거 말고,
> 또 있어.”
> “뭐?”
> “내년
> 4월에 탈 거야.
> 2천만원 짜린데,
> 3년 부은 거야.
> 통장,
> 싱크대 두 번째 서랍 안에 있어.
> 그리구…
> 나 생명보험도 들었거든.
> 재작년에 친구가 하도 들라고 해서 들었는데,
> 잘했지 뭐.
> 그거 꼭 확인해 보고….”
> “당신 정말…”
> “그리고 부탁 하나만 할게.
> 올해 적금 타면,
> 우리 엄마 한 이백만원만 드려.
> 엄마 이가 안 좋으신데,
> 틀니 하셔야 되거든.
> 당신도 알다시피,
> 우리 오빠가 능력이 안 되잖아.
> 부탁해.”
> 난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.
> 아내가 당황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,
> 소리 내어 엉엉…
> 눈물을 흘리며 울고 말았다.
> 이런 아내를 떠나보내고 어떻게 살아갈까….
>
>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,
> 난 깜짝 놀랐다.
> 집안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.
> 모든 것이 빠져나간 자리에,
> 침대와 소파 식탁 정도만이 오도카니 남아 있는 것이었다.
> “이게…
> 어떻게 된 거야?”
> “내가 오빠한테 부탁해서 이사 좀 해 달라 그랬어.”
> “뭐?”
> “오빠가 동네 가르쳐 줄 거야.
> 여보,
> 나 떠나고 나면 거기 가서 살아.”
> “당신 정말 왜 이래!!
> 그럴 거면,
> 당신이랑 같이 가.”
> “아니야.
> 난 새 집 안 들어갈래.
> 거기선 당신이 새 출발해야지.”
> “당신은,
> 내가 정말 당신 잊길 바래?”
> “……
> 솔직히 말하면 아닌데……
> 그렇다고,
> 당신이 나 떠나고 나서,
> 이 집에서 청승 떨면서 사는 건,
> 더 싫어.”
>
> 텅 비어 있는 집의 한 구석에,
> 우리 부부가 앉아 있다.
> 베란다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.
>
> 아내가 떠나고 난 내 삶은,
> 지금 이 빈집처럼 스산할 거라는 걸 안다.
>
>
> 늦은 밤,
>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.
>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.
> 아내가 내 손을 잡는다.
> 요즘 들어 아내는 내 손을 잡는 걸 좋아한다.
> “여보,
> 30년 전에 당신이 프러포즈하면서 했던 말 생각나?”
> “내가 뭐라 그랬는데….”
> “사랑한다 어쩐다 그런 말,
> 닭살 맞아서 질색이라 그랬잖아?”
> “그랬나?”
> “그 전에도 그 후로도,
> 당신이 나보고
> <사랑한다>
> 그런 적 한 번도 없는데,
> 그거 알지?”
> “그랬나…”
> “어쩔 땐 그런 소리 듣고 싶기도 하더라.”
> “……
> 자!……”
>
> 아내는 금방 잠이 들었다.
> 그런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,
> 나도 깜박 잠이 들었다.
>
> 눈을 뜨니 커튼이 뜯어진 창문으로,
>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.
> “여보!
> 우리 오늘 장모님 뵈러 갈까?”
> “……………”
> “여보.
> 장모님 틀니…
> 연말까지 미룰 거 없이,
> 오늘 가서 해드리자.”
> “……………”
> 좋아하며 일어나야 할 아내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.
> 난 떨리는 손으로 아내를 흔들어 본다.
> “여보…
> 장모님이 나 가면,
> 좋아하실 텐데…
> 여보,
> 안 일어나면,
> 안 간다!
> 여보?!…
> 여보!?……”
> “……………”
>
> 이제 아내는 웃지도,
> 기뻐하지도,
> 잔소리 하지도 않을 것이다.
>
> 난 아내 위로 무너지며 속삭였다.
> 사랑한다고…
> 어젯밤…
> 이 얘기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……
> 모 설문조사에서 복권에 당첨되면 무엇부터 바꾸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있었다.
> 대다수의 남자들이
> ‘아내’라고 대답했다고 한다.
> 대다수 여자들 또한
> ‘남편’이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.
> “아!
> 발 좀 치워봐.”
> 지금 허름한 바지를 입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방걸레질을 하는 그녀,
> 아내…
> 그 모습을 보면서,
> 나도 만약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,
> 나 역시 아내라고 대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.
> 아내가“점심은 비빔밥 대강 해 먹으려고 그러는데,
> 괜찮지?”한다.
> “또 양푼에 비벼먹자고?”
> “응,먹고 나서,
> 베란다 청소 좀 같이 하자.
> 집안 청소 다 했더니,
> 힘들어 죽겠어.”
> “나 점심 약속 있어.”
> “그런 얘기 없었잖아.”
> “…
> 있었어.
> 깜박하고 말 안 한 거야.
> 중식이…
> 중식이 만나기로 했잖아.”
> “그래?
> 할 수 없지 뭐.”
> 해외출장 가있는 친구 중식이를 팔아놓고,
> 중식이한테도 아내에게도 약간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,
> 한가로운 일요일,
> 난 아내와 집에서 이렇게라도 탈출하고 싶었다.
>
> 나름대로 근사하게 차려입고 나가려는데,
> 커다란 양푼에 밥을 비벼서,
> 숟가락 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아내가,
> 나를 본다.
> 펑퍼짐한 바지에 한쪽 다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모양이 영락없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아줌마 폼새다.
> 아내가 입을 우물거리며 묻는다.
> “언제 들어 올 거야?”
> “몰라.
> 저녁도 먹고 들어올지…”
> “나 혼자 심심하잖아.
> 빨리 들어와.”
> “애들한테 전화해 보든가….”
> 아내가 물 한잔을 마시고는“애들 뭐…
> 내가 전화하면 받아주기나 해?
> ‘엄마 나 바쁘니까 끊어’이 소리 하기 바쁘지”한다.
> “친구들 만나든가 그럼!”
> “내가 일요일 날 만날 친구가 어딨어?”
> 그렇다.
> 아내에게는 일요일에 만날 친구 하나 없다.
> 아이들 키우고 내 뒷바라지 하느라 그렇게 됐다는 게,
> 아내의 해묵은 레퍼토리다.
> 그 얘기 나오기 전에 어서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한다.
> 일단 밖으로 나가서,
>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을 끌어 모아 술을 마셨다.
> 밤
> 12시가 될 때까지 그렇게 노는 동안,
> 아내에게 몇 번의 전화가 왔다.
> 받지 않고 버티다가 마침내는 배터리를 빼 버렸다.
> 그리고 새벽
> 1시쯤 난 조심조심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.
> 아내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.
> 자나보다 생각하고 조용히 욕실로 향하는데 아내가 아픈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.
> “어디 갔다 이제 와?”
> “어.
> 친구들이랑 술 한잔…
> 그런데…
> 어디 아파?”
> “낮에 비빔밥 먹은 게 얹혔나봐.
> 약 좀 사오라고 그렇게 전화했는데 받지도 않고…”
> “…
> 배터리가 떨어졌어.”
> “손이라도 좀 따줘.”
> “그러게 그렇게 먹어대더라니…
> 좀 천천히 못 먹냐?”
> “버릇이 돼서 그렇지 뭐.
> 맨날 집안일 하다 보면,
> 그냥 대강 빨리 먹고 치우고…
> 이랬던 게…”
> 어깨에서 손으로 피를 몰아서 손끝을 바늘로 땄다.
> 아내의 어깨가 어느새 많이 말라 있었다.
>
> 다음날,
> 회식이 있어,
> 또 늦은 밤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.
> 그런데 아내가 또 소파에서 웅크린 자세로 엎드려 있다.
> “여보,
> 들어가서 자.”
> “여보,
> 나 배가 또 안 좋으네.”
> “체한 게 아직 안 내려갔나?”
> “그런가봐.
> 소화제 먹었는데도 계속 그래.”
> “손 이리 내봐.”
> 그런데 아내의 손끝은 상처 투성이었다.
> “이거 왜 이래?
> 당신이 손 땄어?”
> “어.
> 너무 답답해서…”
> “이 사람아!
> 병원을 갔어야지!
> 왜 이렇게 미련하냐?”
>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.
> 여느 때 같으면,
> 마누라한테 미련하냐는 말이 뭐냐며 대들만도 한데,
> 아내는 그럴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.
> 그냥 엎드린 채,
> 가쁜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.
>
> 난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.
> 아내를 업고 병원으로 뛰기 시작했다.
> 그런데 응급실에 도착하자 아내가 속삭였다.
> “여보.
> 병원 오니까,
> 괜찮은 거 있지.”
> “가만 있어봐.
> 검사 받아야 되니까.”
> “아니…
> 진짜 말짱해.
> 아까 잠깐 그렇게 아팠나봐.”
> “온 김에 검사 받고 가.”
> “뭐 하러 그래?
> 응급실 얼마나 비싼데~
> 내일 병원 문 열면,
> 가서 검사 받을게.”
> “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…”
> “가자니까.
> 응급실은 완전 바가지야.”
>
> 잡을 틈도 없이,
> 아내는 먼저 일어나 나간다.
> 나도 머쓱하게 아내를 따라 나온다.
> 하긴 아내의 말처럼 응급실은 보통 진료비보다 훨씬 비싸다.
>
> 집으로 오는 길,
>
> “진짜 괜찮아?”
> “응.
> 나 학교 다닐 때도,
> 시험 보기 전날이면 배 아프고 그랬다?
> 그런데 병원만 딱 오면 배가 안 아픈 거야.
> 그게 다 신경성이라 그런가봐.”
> “그러게,
> 사람 놀래키고 그래?
> 아프면 바로바로 병원 가고 그래.”“어머,
> 당신 놀랬어?
> 어유~
> 그래도 홀아비 되긴 싫었나봐?”
> “싫긴 뭐가 싫으냐?
> 홀아비 되면,
> 젊은 마누라도 새로 들이고 좋지.”
> “내가 말을 말아야지…”
>
> 참 오래전부터 내 곁에서 이렇게 함께 걸어왔던 아내.
> 그녀와 아주 오랜만에…
> 함께 길을 걸어본다.
>
> 다음날 병원에 다녀온 아내는,
> 회사 앞에서 내게 전화를 걸었다.
>
> “난데,
> 우리 점심 먹을까?”
> “바쁜데…”
> “회사 앞까지 왔는데?”
> “그래.
> 알았어.
> 병원은 갔다 왔어?”
> “어.
> 신경성 위염이래.
> 남편이 속 썩이냐고 물어보더라.
> 의사선생님이……”
> “나만큼 잘하는 남편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.
> 그런데,
> 뭐 먹고 싶어?”
> “죽 먹자.
> 요즘 좋은 죽 집 많다며?
> 그런 데 가서 우아하게 먹어보고 싶다.”
> “여기 괜찮지?"
> “횟집에서 죽도 파네?”
> “어.
> 우리 회식할 때 자주 오는 데야.”
> “그런데 너무 비싸다.
> 죽 한 그릇에 만 오천 원씩이나 해?
> 태어나서 이렇게 비싼 죽은 처음 먹어보네.”
> 아내는 죽을 바닥까지 긁어먹는다.
> 갑자기 열심히 죽을 먹는 아내가 안쓰러워 보였다.
> 만 오천 원짜리 죽 한 그릇이 아까워 그릇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먹는 아내…
> 난 몇 십만 원짜리 술도 아무렇지 않게 먹는데…
> 내 아내는 태어나 이렇게 비싼 죽을 처음 먹어 본단다.
> 그동안 내가 뭘 하고 살았나 생각이 문득 들었다.
> “여보,
> 할 말이 있는데.”
> “어,
> 얘기해.”
> “추석 때 있잖아.
> 친정부터 가면 안 될까?”
> “왜 또 그래?
> 어머니 성격 알면서…”
> “그러게.
> 30년 넘게 어머니 성격 아니까,
> 명절 때마다 당신 집부터 갔잖아?”
> “명절 때 시댁부터 가는 건,
> 당연한 거야.”
> “당신 집은 오남매야.
> 그치만 우리 집은 오빠랑 나밖에 없잖아.
> 엄마가 얼마나 외로워하시는데…”
> “추석 끝나고 가면 되잖아.”
> “어머니도,
> 당신도 웃겨.”
> “여보,
> 왜 이래?
> 새삼스럽게.”
> “그럼 이렇게 해.
> 추석 때 당신은 당신 집 가.
> 난 우리 집 갈 거야.”
> “어머니가 가만 계시겠어?”
> “가만 안 계시면 어떡하실 건데?
> 나도 할 만큼 했어.
> 맘대로 하시라 그래.”
> “당신,
> 오늘 좀 이상하다.”
> “30년 동안,
> 그만큼 이기적으로 부려먹었으면 됐잖아.
> 내가 이 정도 얘기하는 것도,
> 그렇게 이상해?”
>
> 큰소리친 대로,
> 아내는 추석이 되자,
> 짐을 몽땅 싸서 친정으로 가 버렸다.
> 나 혼자 고향집으로 내려가자,
> 어머니는 노발대발하시며,
> 세상천지에 며느리가 이러는 법은 없다고 난리를 치셨다.
> 지난
> 30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니,
> 이번만큼은 노엽게 생각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지만,
> 오히려 마누라 편든다며,
> 내게도 잔소리를 늘어놓으셨다.
>
> 여동생은 여동생대로 제 새언니 흉을 보면서,
> 무슨 며느리가 그렇게 제멋대로냐고 했다.
> 자기는 임신을 핑계로,
> 추석 전부터 친정집에 와서 쉬고 있으면서,
> 제 새언니가 친정에 간 건 그렇게 못마땅한가 보다.
>
> 아내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니,
> 우리 가족이지만,
> 하는 말마다 행동마다 참 얄미울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.
> 결혼하고 처음.
> 아내가 없는 명절을 보냈다.
>
> 집으로 돌아오니,
> 아내가 태연히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.
> 여유롭게 클래식 음악까지 틀어놓고 말이다.
> “당신,
> 지금 뭐 하는 거야?”
> 아내가 음악을 끄면서 대답했다.
> “음악 들으면서 책 보잖아.
> 왜?”
> “제정신이야?
> 어머니 얼마나 화나셨는지 알면서,
> 명절 내내 전화 한 통화 안 해?”
> “어머니 목소리 별로 듣고 싶지 않았어.
> 간만에 좋은 기분,
> 망칠 필요 없잖아.”
> “뭐??”
> “가끔 뉴스에서 주부 우울증으로 투신자살하는 여자들 얘기 들으면,
> 생각했었어.
> 남은 가족들은 어쩌라고 저랬을까?”
> “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?”
> “그런데,
> 나 이제 이해가 돼.
> 그 여자들은 남은 가족들이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택했을 거야.”
> “그게 말이 돼?”
> “내가 지금 없어져도,
> 당신도 애들도 어머님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을 거야.
> 처음엔 조금 슬프겠지만,
> 금방 잊을 거야!”
> “……여보?!……”
>
> 아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.
> “여보.
> 나 명절 때 친정에 가 있었던 거 아니야.
> 나,
>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 검사 받았어.
> 당신이 한번 전화만 해봤어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거야.
> 당신이 그렇게 해주길 바랬어.
> 그래서,
> 내가 어디로 갔을까 놀라서 나를 찾아주길 바랬어.
> 침대에 혼자 누워서 당신이 헐레벌떡 나타나 주면,
> 뭐라고 하면서 안길까…
> 혼자 상상 했었어.
> 그런데,
> 당신 끝내 안 나타나더라.
> 끝내 나 혼자 두더라.”
> 그랬다.
> 아내의 병은 가벼운 위염이 아니었던 것이다.
>
> 다음날 나와 아내는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.
> 검사 결과에 대해 얘기를 듣기 위해서였다.
> 가는 내내 아내는 무거운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.
> 내가
> “죽으러 가냐?”했다.
> “무슨 말을 그렇게 해?”
> “설령 위암이라고 하더라도,
> 요즘 위암?
> 아무것도 아니야.
> 요즘은 다 고쳐.”
> “그래.
> 누가 뭐래?”
> “악성도 다 고친다구.
> 내 친구 차 교수 알지?
> 그 친구도 위암
> 3기였는데,
> 멀쩡하잖아.
> 요샌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 거!
> 진짜 아무 것도 아니라구!”
> 누구를 위로하기 위해 큰소리를 치는 건지 알 수 없었다.
>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한 건지,
> 나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건지…
> 큰 소리 치면서도 운전대 잡은 손에 땀이 흥건하게 고였다.
> 그러면서도 난 끝까지 중얼거렸다.
> “암?
> 쳇!
> 그런 거 아무 것도 아니야.
> 아무 것도…”
>
> 난 의사의 입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.
>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,
> 내 아내가 위암이라고?
> 전이될 대로 전이가 돼서,
>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고…
> 수술도 하기 어려운 상태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…
> 가고 싶은 데 있다고 하면 데려가 주고,
> 먹고 싶은 거 있다고 하면 먹게 해 주라고…
> 삼 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고…
> 지금,
>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?
> 자기가 뭔데!
> 자기가 하나님인가?
> 자기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아나?
> 내 아내가 내 곁에서
> 3개월을 살지,
> 3년을 살지,
> 30년을 살지 어떻게 알고 저렇게 함부로 말을 한단 말인가!
>
> 따지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,
> 그리고 멱살이라도 잡고,
>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,
> 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,
> 그저 의사의 입을 바라보고만 있었다.
>
> 아내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.
> 유난히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맑았다.
> “……
> 여보!!……”
> 아내의 음성이 조용히 귓가에 내려앉는다.
> 아내가 살포시 팔짱을 끼고,
>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.
> 난 아내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다.
> 지금 그녀를 보면,
> 절망으로 가득한 내 얼굴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.
> 그러긴 싫었다.
> “여보….”
>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.“왜?”
> “………
> 미안해.”
> “미안하긴 뭐가 미안해?
> 내가 아까 말했지?
> 차 교수도 처음에 병원 갔을 때,
> 똑같이 말했대.
> 차 교수도
> 3개월,
> 아니
> 2개월 산다 그랬대!
> 그런데 지금 봐.
> 멀쩡하게 다니잖아.
> 그 친구가 나보다 힘도 더 세고 더 튼튼해!
> 의사 자식들이 하는 말,
> 저거…
> 다 뻥이야!
> 사람 겁주고…
> 어?
> 겁줘서 돈 뜯어낼려고 하는 소리야!
> 믿지 마,
> 저런 말!!”
> 나는 바보다.
> 끝까지 아내 앞에선 강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큰 소리 치고 있다.
> 하지만 난 지금 너무 무섭다.
> 아내가 잡고 있는 내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너무너무 겁나고 무섭다.
> 아내의 따뜻한 손이 내손을 꼭,
> 더 꼭 잡아준다.
>
> 집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서로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.
> 주위에서 누가 암에 걸렸다,
> 누구 부인이 죽었다 이런 얘기 많이 듣는 나이가 됐지만,
> 그런 일이 내게 닥칠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.
> 엘리베이터에 탄 아내를 보며,
> 앞으로 나 혼자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 어떨까를 생각했다.
> 문을 열었을 때,
>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아내가 없다면,
> 방걸레질을 하는 아내가 없다면,
> 양푼에 밥을 비벼먹는 아내가 없다면,
>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잔소리해 주는 아내가 없다면,
> 나는 어떡해야 할까를 생각했다.
> 처음으로 우리 집으로 장만한 이 아파트에는 아내의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이다.
> 집에 들어서니
> “여보,
> 우리 이사 갈까?”하고는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내가 말했다.
> “여기 우리 둘이 살기에는 너무 넓잖아?”
> “됐어.
> 난 여기가 좋아.”
> “아니야.
> 너무 낡았어.
> 이 집 팔고 조금 작은 평수,
> 새 집으로 이사 가면 좋잖아.”
> “됐다고 하잖아.”
> “이 집이 당신 괴롭힐 거라고 생각하니까,
> 이 집…
> 정말 싫어.”
>
> 다음날,
> 아내는 함께 아이들을 보러 가자고 했다.
> 아이들에게는 아무 말도 말아달라는 부탁과 함께.
>
>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은,
> 갑자기 들이닥친 부모가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.
> 하지만 아내는 살갑지도 않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,
> 공부에 관해,
> 건강에 관해,
> 백번도 넘게 해온 소리들을 해대고 있다.
> 아이들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한데도,
> 아내는 그런 아이들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만 있다.
> 난 더 이상 그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.
> 아이들을 만난 후 아내가“여보,
> 집에 내려가기 전에…
> 어디 코스모스 많이 피어 있는 데 들렀다 갈까?”했다.
> “코스모스?”
> “그냥 그러고 싶네.
> 꽃 많이 피어있는 데 가서,
> 꽃도 보고,
> 당신이랑 걷기도 하고…”
> 아내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이런 걸 해 보고 싶었나보다.
> 비싼 걸 먹고,
> 비싼 걸 입어보는 대신,
> 그냥 아이들 얼굴을 보고,
> 꽃이 피어 있는 길을 나와 함께 걷고…
> “당신,
> 바쁘면 그냥 가고…”
> “아니야.
> 가자.”
>
> 코스모스가 들판 가득 피어있는 곳으로 왔다.
> 아내에게 조금 두꺼운 스웨터를 입히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.
> “여보,
> 나 당신한테 할 말 있어.”
> “뭔데?”
> “우리 적금,
> 올 말에 타는 거 말고,
> 또 있어.”
> “뭐?”
> “내년
> 4월에 탈 거야.
> 2천만원 짜린데,
> 3년 부은 거야.
> 통장,
> 싱크대 두 번째 서랍 안에 있어.
> 그리구…
> 나 생명보험도 들었거든.
> 재작년에 친구가 하도 들라고 해서 들었는데,
> 잘했지 뭐.
> 그거 꼭 확인해 보고….”
> “당신 정말…”
> “그리고 부탁 하나만 할게.
> 올해 적금 타면,
> 우리 엄마 한 이백만원만 드려.
> 엄마 이가 안 좋으신데,
> 틀니 하셔야 되거든.
> 당신도 알다시피,
> 우리 오빠가 능력이 안 되잖아.
> 부탁해.”
> 난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.
> 아내가 당황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,
> 소리 내어 엉엉…
> 눈물을 흘리며 울고 말았다.
> 이런 아내를 떠나보내고 어떻게 살아갈까….
>
>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,
> 난 깜짝 놀랐다.
> 집안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.
> 모든 것이 빠져나간 자리에,
> 침대와 소파 식탁 정도만이 오도카니 남아 있는 것이었다.
> “이게…
> 어떻게 된 거야?”
> “내가 오빠한테 부탁해서 이사 좀 해 달라 그랬어.”
> “뭐?”
> “오빠가 동네 가르쳐 줄 거야.
> 여보,
> 나 떠나고 나면 거기 가서 살아.”
> “당신 정말 왜 이래!!
> 그럴 거면,
> 당신이랑 같이 가.”
> “아니야.
> 난 새 집 안 들어갈래.
> 거기선 당신이 새 출발해야지.”
> “당신은,
> 내가 정말 당신 잊길 바래?”
> “……
> 솔직히 말하면 아닌데……
> 그렇다고,
> 당신이 나 떠나고 나서,
> 이 집에서 청승 떨면서 사는 건,
> 더 싫어.”
>
> 텅 비어 있는 집의 한 구석에,
> 우리 부부가 앉아 있다.
> 베란다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.
>
> 아내가 떠나고 난 내 삶은,
> 지금 이 빈집처럼 스산할 거라는 걸 안다.
>
>
> 늦은 밤,
>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.
>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.
> 아내가 내 손을 잡는다.
> 요즘 들어 아내는 내 손을 잡는 걸 좋아한다.
> “여보,
> 30년 전에 당신이 프러포즈하면서 했던 말 생각나?”
> “내가 뭐라 그랬는데….”
> “사랑한다 어쩐다 그런 말,
> 닭살 맞아서 질색이라 그랬잖아?”
> “그랬나?”
> “그 전에도 그 후로도,
> 당신이 나보고
> <사랑한다>
> 그런 적 한 번도 없는데,
> 그거 알지?”
> “그랬나…”
> “어쩔 땐 그런 소리 듣고 싶기도 하더라.”
> “……
> 자!……”
>
> 아내는 금방 잠이 들었다.
> 그런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,
> 나도 깜박 잠이 들었다.
>
> 눈을 뜨니 커튼이 뜯어진 창문으로,
>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.
> “여보!
> 우리 오늘 장모님 뵈러 갈까?”
> “……………”
> “여보.
> 장모님 틀니…
> 연말까지 미룰 거 없이,
> 오늘 가서 해드리자.”
> “……………”
> 좋아하며 일어나야 할 아내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.
> 난 떨리는 손으로 아내를 흔들어 본다.
> “여보…
> 장모님이 나 가면,
> 좋아하실 텐데…
> 여보,
> 안 일어나면,
> 안 간다!
> 여보?!…
> 여보!?……”
> “……………”
>
> 이제 아내는 웃지도,
> 기뻐하지도,
> 잔소리 하지도 않을 것이다.
>
> 난 아내 위로 무너지며 속삭였다.
> 사랑한다고…
> 어젯밤…
> 이 얘기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……








